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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래 기사와 관련된 남성이 20일 오후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그러진 사회에서, 삶의 한 부분이 또 일그러져 가슴아파했을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또 이 일로 아파할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사회에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곡된 사회, 헝클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길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관계는 사회 속에서 형성됩니다. 스스로가 자기 의지만을 가지고 형성한 듯한 관계도 결국은 사회 속에서 형성되고 그 사회의 특성을 반영하곤 합니다. 이러한 사회가, 그 안의 관계가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어 내었네요.
가슴이 아픕니다. 좀 더 나은 관계가 형성되는 그 날을 기다려 봅니다. (2009/01/20)
기사 제목: "부부 사이 형법상 강간죄 적용은 지나쳐"
모 가톨릭 신부가 이런 주장을 했단다.
"상대방 배우자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 금욕과 절제하는 '사랑의 인격성'도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또한 거꾸로 상대방 배우자가 간절히 원할 경우 몸에 중대한 질병이 있다거나 하는 거절할 만한 중대한 사유없이 거부하는 것도 배우자의 성실성에 위배되는 '과잉 거부'가 될 수 있다"
"판결 내용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할 경우 (가정의 중요성이란) 본말이 전도될 수가 있다. 거듭 얘기하지만 부부 사이에 강간이라는 것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 교회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번 판결의 의미를 너무 일반화시켜 염려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생각된다"
사건의 내용은?
'생리 기간을 이유로 잠자리를 거부한 부인에게 남편이 흉기를 들고 성폭행을 했다'
강간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는 일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강간인가 강간이 아닌가에 대한 논의는 어느 정도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기사를 따르자면) 모 신부는 '부부 사이에 강간이라는 것이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당위적으로 보자면, 강간이라는 것은 "부부 사이에"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 어느 누구의 관계에서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다른 관계에는 강간이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닌 다음에야), 그 부분을 뭐라 할 이유는 크게 없다. 굳이 '부부 사이에'라는 말 다음에 위치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은 아래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보기에 우선 다음으로 넘어가 보자.
"부부 사이에 강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있을 수도 없다"는 부분은 어떠한가? 어떠한 확대 해석도, 넘겨 짚기도 하기 싫기에 여러 가지 의미로 가정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0. "부부 사이에 강간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노력하자."라는 뜻이라면 환영할 이야기이다.
나도 그 말을 하고 싶다.
1.
만약 교리가 "부부 사이에 강간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과 같다."라고 이야기 한다면 난 그 책을 과감히 찢어 버릴 것이다. 즉, 단순히 현실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이야기 하자면, 이미 많은 경우 일어나고 있기에 "있을 수 있는, 아니 이미 이는 것이다."라고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단순히".
2.
"부부 사이에 강간이라는 개념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어림 없는 소리이다. 어느 관계에서도 있어서는 안 되는 강간이 부부 사이에서 일어났다면, 그 역시 그러한 개념을 적용하여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든 해야하는 것이지, '이것은 강간이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는가? "성관계"가 부부 사이의 의무라는 것을 들어, 더 큰 가치인 신체의 자유, 신체를 보호할 권리, 관계를 거부할 권리 등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단지 생리 기간이란 것을 이유로 거절한 경우를 중대한 거절 사유로 보고 더욱이 강력한 형법조항인 강간죄로 다스린 것은 과도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래, 결국 "단지" 생리기간이었다는 것이 거부할 권리를 묵살할 수 있는 논리의 근거가 된다. 그 "단지"에 해당하는 "생리 기간"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조금 불편한 시간? 몸이 좀 안 좋은 시간? 그 다지 성관계를 못할 정도로 힘들지는 않은 시간? 경험에서 나온 것인지 어떤 의학적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가지고 있을 논리의 근거라는 "단지 생리 기간"은 그 고통의 정도 길이에서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기간으로 알고 있다. 평균을 낸 것인지, 옆 사람에게 물어본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정도를 사회적으로 정의 내려 사용한 것이라면, 그 평균의 잣대를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 역시 거부해야 한다. 생리 기간의 고통, 기간 중 성 관계 시 수반되는 감염의 위험성 등에 대한 교육은 얇은 성 교육 책에도 나와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닐까?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의무를 먼져 생각해 본다면, 타인의 상황이나 감정, 고통 등의 정도를 "단지"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또한 "단지"로 수식된 "생리 기간"이 아니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 나의 신체, 상대의 신체에 대한 존중의 의무, 관계를 거부할 권리 등을 생각한다면, 언제든 성관계를 할 수 있는 반면에, 언제든 성관계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권계를 "요구"한다면 "거부"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 어느 누구도 성관계를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의무"화 하지 말아야 한다. 성관계가 부부 사이에 또는 연인 사이에 중요한 부분이라 인식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그들의 선택, 그들의 자유인 것이다. 성관계를 해야만 하고, 그것을 거부 하는 것은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식의 논리가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인지, 누가 규정지어 놓은 교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싶다. "관계"라는 것은 "서로"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소유"되고 "규정"지어 지는 것이 아니기에......
3.
"부부는 강간까지 가지 않도록 왠만하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무어라 해야 할까?
그래, 왠만하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그럼 "왠만한"건 무엇이고 "의견 존중"의 주체는 누구인가?
교리책을 뒤져 보아도 "왠만하다"에 대한 정의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다분히 주관적인 표현이 아닌가. 그걸 누가 강요하겠는가? "왠만하면"의 정의는 "왠만하면" 그들 자신에 맡겨 두도록 하자.
그렇다면 부부 사의와 같은 "관계" 속에서의 그 정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서로가 의사소통을 하는 속에서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앞에서 언급했던 의무와 권리 등을 떠올리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속에서 찾아가야 하는 개념인 것이다.
"의견 존중"의 주체는 이미 글 포함되어 있었다. "서로". 그렇다. 서로, 각자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무엇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관계를 맺지 말자는 강요"를 이야기 한다면, "강요"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강요는 누군가에게 강제로 요구하는 것이다. 요구하는 주체는 능동 요구받는 객체는 수동일 때 "강요"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을 요구 했을 때 그 주체는 능동이다. 그에 대해 성관계를 하자고 요구한다면 그 주체 역시 능동이다. 그들이 의사소통을 하는 과정에, 서로의 의견이 존재한다면 그 의사소통 속의 주체는 능동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의 의견이 묵살당하고,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다면,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의 의견이, 상대방의 동의 여부와 관계 없이 관철되어 버린다면 그 때 상대방은 수동의 개념으로 빠지는 것이다. 여기에 적용 되는 것이 "강요"이다.
성관계를 거부하는 사람이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고 성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강제했다면, 그것은 강요가 될 수 있다. 의사소통을 차단하고 상대를 묶어 버리다든지(물리적인 표현이 아니다), 물리적인 외압을 가해 성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강요일 수 있다. 그 반대도 바찬가지 이다. 성관계를 강요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강요"를 거부하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성관계를 못하도록 하는 강요를 거부하고 성관계를 하도록 하는 것, 성관계를 하도록 하는 강요를 거부하고 성관계를 안 하는 것, 이 두가지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결국 다시 의사소통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서로가 능동이 되어 어떠한 해결책을 찾아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그 지점으로 돌아가야만 그 어떤 "강요"도 피해갈 수 있다. 그것이 쉽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그래, 쉽지 않은 것이 관계이다. 때문에 노력하라고 하지 않는가? 쉽지 않아 노력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 가는 것이 바로 폭력이고 강요이며, 말 그대로 "지나침"이 되는 것이다.
"부부 사이 형법상 강간죄 적용은 지나쳐"요?
과도함을 이야기 한다. 지나치다 한다. "다만 예외적으로 어느 한쪽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할 말은 없다"이라 한다. 한쪽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가 아니라면 강간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인가? 간강죄에 대한 처벌이 누군가에게 "과도해" 보일 정도로 엄중한 이유는 그것이 그 만큼 "중대한 사회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신체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다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행위이기 때문인 것이다.(강간죄에 대한 형법 처리의 과도함 자체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이야기이에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생리 기간"이 "중대한 거절 사유"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이전에, 이 사건에서 나타난 행위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를 먼저 판단해 보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사랑/존중/의무를 강조하자면 어찌 해야 하나?
가족을 강조한다. 가정 내의 사랑을 강조한다. 화목한 가정을 지향한다. 서로에 대한 존중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그 가족을 힘들게 하고 가정 내의 사랑을 사그라 들게 하고, 화목한 가정을 파괴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을 하지 않은 주체가 누구인지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심각성을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판결 내용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 할 것을 우려하기 이전에, 이 사회에 숨어 있는 문제들, 중대하지만 가리워져 있거나 과도히 축소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들을 확대해 보았으면 한다. 지나치게 확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냉대받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 서로가 고민해 볼 것을 요구한다.
미친소리 한 번 해보자.
미친 소리 한 번 해보겠다. 그다지 미친 것 같지도 않지만......
어느 성당 교리에 "이성애자 부부에게 말한다. 여성이 생리 중이더라도, 그것은 성관계를 거부할 만한 중대한 사유가 못 되므로, 남성이 성관계를 너무 하고 싶어하면, 그가 흉기를 들고 위협하기 전에 성관계를 해 줘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있다면 나는 그 성당 그만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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