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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부활절이었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적어도 그리스도교회에게는 교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날이다. 예수가 인간의 궁극적인 두려움의 근원 중 하나이면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그리스도교를 존재하고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마스가 신이 인간의 모습을 가짐으로써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면, 부활절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나 그 어느 종교의 순수성을 또는 그 교리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가 인간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부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의도가 어찌되었든 "부활 교리" 역시도 이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예수의 삶을 따르는 사람 또는 그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그의 부활도 함께한다는 교리는 교인들이 예수를 닮고자 하는 동기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교인으로 정체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가족이나 지인을 잃은 이들에게 슬픔을 극복하는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다"라는 위로의 말과 같이 "부활을 함께할 것"이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는 부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세월호의 비극이 발생하고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 아픔은 쉽게 잊혀질 수 없다. 아니 잊혀지기 힘들다.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잊는다는 말이 아니라 가슴 속에 품고 산다는 말일 것이다. 그만큼 극복 불가능의 아픔을 겪고 있을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들려오는 부활의 메시지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위로가 되어 줄까? 크나큰 아픔과 극복하지 못한 상처 때문에 의심이나 부정을 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아픔을 극복하기위해서는 우선 그 아픔을 주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제되어야한다. 개인적으로 가족과 친구를 떠나보내고나서 그것을 극복하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것이 그들이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들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경우에는 받아들이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괜시리 방문을 열어보기도하고 예전 번호로 전화를 해보기도 한다. 모습이 보이지 않고 답을 듣지 못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인정을 하게 되는 듯 하다. 임종을 지키거나 떠나간 그들의 육신을 확인하고 땅에 묻은 경우에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죽음이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기도 하고 죽음과 관련된 상황, 죽음과 관련된 존재를 의심하기도 한다.


질문은 여러가지의 형태를 가진다. "정말?"이기도 하지만 "왜?"가 되기도 한다. 왜 나를 떠나가야 했는가는 때로 왜 그들을 데려가야 했는가라는 전지적인 존재를 향한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후자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종교적/철학적 질문에는 답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몇가지의 사실, 죽음과 관련된 증거, 증거로 이끄는 단서 등이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죽음을 인정하게 해주기도 하는 듯 하다. 아니 그것이 시작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질적인 증거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나서야 정신적이라거나 종교적인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너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고있다. 단순한 질문에 대한 답도 찾지 못해 가슴에 묻어두고자 해도 그럴 수 없는 그 심정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그냥 받아들이라는, 그냥 가슴에 묻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선택지가 되지는 말아야한다. 이웃이 된 우리는, 우리가 답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신에게 묻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면, 적어도 그에 답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가야 할 것이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고 부활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이 쉽지만은 않다. 우리가 답할 수 있는 부분을 외면하고 던지는 위로의 말이, 희망의 한마디가 의미 없을 것이 아닐까, 사치스러운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힘없는 개인이 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답을 주려고 노력한다면 할 수 없는 것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너무 많은 이들이 고통받아왔고 고통받고 있다. 그들의 고통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며 외면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극복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미래에 대한 교훈, 내일의 삶의 기준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이들이는 것이 전제 되어야한다. 남의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가족을 잃었다.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대한민국이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또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가 힘을 모아야한다. 그래왔어야 했고, 앞으로 또 그리해야 한다. 그런 이후에야 우리는 이 아픔에서 또 교훈을 얻어 더 아름다운 미래를 약속할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아갈게요. 그리고 당신 뜻대로...."

"니 몫까지 열심히 살게....."

가족을 떠나보내고, 친구를 떠나보내며 했던 다짐이다. 오래전 일이었음에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저렇게 다짐하고 극복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가 그 답을 찾아보아야 한다. 적극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1년이 지난 지금, 부활의 메시지가 위로나 희망이 되지 못하는 슬픔 속에서, 1년, 5년, 10년후의 부활 메시지는 위로나 희망의 그것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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